1. 사실 뉴스타파나 시사인의 국정원 기획 한겨레21의 세월호 연속 보도 같은 건 좋은 기사를 찾아 읽고자 노력하는 나에게도 벅차다. 물론 아카이빙은 필요하다. 하지만 읽는 것이 힘든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피키캐스트나 위키트리가 페이스북 상에서 상당한 인기를 끄는 이유도 다른 뉴스에 비해 쉽고 가볍기 때문일 것이다. 일정 비율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누가 무거운 칼럼을, 세부적으로 샅샅이 파헤친 기사를 읽을까. 


과연 복잡하면서도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정보를 전달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효율적으로 또는 제대로 전달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나는 그 지점이 회의적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위키트리나 피키캐스트는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어쨌든 그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것들이 다른 언론사가 올리는 것들에 비해 몇 배는 쉽게 노출되니 말이다. (그들이 구성한 정보 중에서도 연합뉴스 등을 통해 바로 가져오는 정치경제 관련 기사는 잘 읽히지 않고 '좋아요'도 얼마 눌리지 않는다) 물론 쉽게 쉽게 읽고 정리할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은 선동의 영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콘텐츠의 양과 질은 압도적으로 늘어나고 높아졌는데 왜 점차 정보의 간극이 커져가는 것처럼 보일까. 


2. 늘 궁금한 것은 과연 신문이나 정물화가 어떤 가치가 있어서 살아남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은 없고 푸세식 화장실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못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다. 괜히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지하철에는 어느덧 무가지를 읽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탁소 주인 아저씨는 10년 전처럼 아파트를 돌며 세탁물을 받고 야쿠르트 아줌마는 잠시 카트를 세워두고 동네 마실나온 할머니들과 요구르트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3. 잘 모르겠다. 헬조센이 무슨 '담론'씩이나 되나. 그냥 기존에 하던 욕지거리가 적당한 말을 찾은 것 뿐이지. 웃고 킬킬거리는 것일 뿐이지. '이 나라는 망했어', '빨리 외국으로 나가자', '미래가 없어'는 말을 헬조센 안에 응축시킨 것 뿐이다. 거기에 뭔가 대단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나오기는 어렵다. 높은 확률로 단어가 인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 경우엔 그저 동어반복이다. 


301. 젊은 세대가 앞으로 나아갈 희망이 없어서 절망한다는 말을 들었다. 웃기는 소리다. 다른 세대와 같다. 젊은 세대도 생존을 걱정한다. 조금씩 나아진다는 희망 같은 건 버린지 꽤 오래다.


302. 위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이어지는 세대가 자동적으로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수명이 계속 늘어나고 아래 세대가 계속 없어지는 지금 시점에서 이는 결국 자본 간의 경쟁일 뿐이지 누가 죽어 없어진다고 갖지 못했던 누군가가 뭔갈 자동적으로 더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오히려 부의 되물림으로 인해 더 편중된 빈부격차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지금 20대는 현행 출산율로 이전 세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는 착취할 아래 세대도 없기 때문에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뭔가 착취해야 결국 상대적으로 위로 올라서는 것이 아닐까. 


303. 그럼에도 나는 기성세대가 나름대로 노력했고 그들의 방법이 최선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다. 그들은 나름의 삶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304. '헬조센' 같은 분노하는 수사만으로 이성적인 해결책을 도출해내지 못한다는 말도 사실 허구다. 많은 경우 해결책은 이미 나와있다. 다만 이는 헬조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사실 분노와 이성적 성찰 사이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 분노를 하면서도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지점이 있다. 그리고 아닌 지점이 있다고 본다. 


305. 수사로서의 가능성에서 '헬조센'은 나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많은 지점에서 애국심이 동원되는 나라이다. 일례로 얼마전에 만들어진 프로그램 '나는 대한민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방적으로 선전되는 수사에 대응할 수사 역시 간결해야 한다. 물론 정확한 비판은 언제나 필요하다. 헬조센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할 수 있겠으나 수사로서의 가능성에 헬조센은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있고 그것까지 부정할 수 없다. 아니면 전체 문제의식을 포괄하면서 해결방안까지 도출할 수 있는 섹시한 수사를 한 번 이끌어내보시든지. 


306. 차라리 헬조센 담론을 비판하고 싶으면 마치 마스터키라도 되는 양 심심찮게 헬조센을 신문지면에 들여오는 식자들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엄밀히 비판해야 할 의무가 있고 헬조센을 담론의 영역 안에 끌어들인 것도 그들이기 때문이다. 애먼 사용자들을 비판할 문제는 아니다. 


4. 다이버시티 대담 중에서 발취했다. '어떻게 보면 노동기사가 가장 쉬울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집회 현장 가서 그 사람들 이야기, 그러니까 부당 해고 당했다는 억울한 이야기 들어주고 기사를 쓰는 건 어떻게 보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 행동이에요. 그리고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아요. 그런 기사는 기업에서도 아파하지 않거든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니까. (중략) 그런 걸 넘어서야 해요.'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걸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 읽은 기분이었다. 나는 모 매체가 이런 '쉬운' 기사를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 쉬운 기사라는 말이 아니라) 근데 그마저도 기사 속에 화려한 미사여구가 많아 도무지 노동자들이 쉽게 읽을 수도 없는 그런 기사를 쓴다. 그리고 그 기사를 소비하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노동자가 아닌) 관계자들이다. 


솔직히 말해볼까. 이런 기사는 어느 누구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다. 대체로 저런 기사를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문체에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문체를 정립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기자들인데 그건 적어도 기사의 목적은 될 수 없다. 그건 소설가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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