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아니면 한 번 이상 이 블로그를 찾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적어둘게요. 저는 더 이상 이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줄곧 같은 아이디만 써왔고 저말고 이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 (제가 알기로는) 없으니 아마 쉽게 제가 어디에 공식적으로 또 비공식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찾아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 궁금하시다면 살짝 메일 주세요 alreadyblues@gmail.com) 


아주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와서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을 보니 참 좋네요. (지금이라면 절대로 쓰지 않았을 글도 있어 민망함도 함께 몰아치지만) 사실 스페인에 머물렀던 2013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때의 전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처럼 세월호를 몰랐고, 3년 후에 제 삶이 어떻게 결론지어졌을지도 몰랐습니다. 2013년은 2012년에 겪었던 여러 끔찍했던 일들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고 있을 때였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일이 일과의 전부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쓰는 글로 뭔가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을 때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것들 중 무엇도 갖고 있지 않거나 일부만을 간신히 붙들고서 있습니다. 


사실 지금의 저는 2013년처럼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글로 뭔가를 할 수 있으리란 믿음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어떻게든 글을 꾸역꾸역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습니다. 과연 내게 아직도 어떤 욕구가 남아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관성인지 경로의존성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잊어버렸으니 또 열심히 찾아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제가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을 때처럼 온전히 제 자신일 수 있고 또,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을 명확히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 때가 있기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그런 때가 찾아오길 바랍니다. 


혹 이 글을 읽고 제가 만든 또 다른 글쓰는 공간을 찾는 분이 계신다면 꼭 제게 알려주세요. 그럼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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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직 완전히 무르익은 대안은 아니지만 장강명 작가의 논지가 좋았던 이유가 있다. 장강명 작가는 문단이나 작가 지망생을 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단이 어떻게 독자들과 함께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측면은 나머지 작가들에게서 유독 부족한 부분이기도 했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그 시선에 동의하고 옳다고 여긴다. 문단의 구조를 이야기하면서 독자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2. 문학동네 가을호 좌담을 읽고 '잘 된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가을호에 나온 것처럼 원래 잘 만들어진 작품을 비평하기가 훨씬 어렵다. 못 만들어진 것의 어떤 부분이 못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아주 쉬운 일이다. 신형철은 아마도 여러번, 잘 만들어진 작품에만 집중하며 비평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3. "모리악이 쓴 <테레즈 데케이루>라는 소설을 자주 떠올리곤 합니다. 이 소설에는 남편을 독살하려는 테레즈라는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남편을 독살하려 했는가? 사랑하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워해서?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테레즈는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편을 독살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편의 눈동자 속에서 불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거야 말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군들도 여하튼 일본의 권력 구조, 체제의 눈 속에서 불안을 보고 싶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과는 다른 방향에서 (미시마 유키오·기무라 오사무 외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김항 옮김, 새물결, 2006,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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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신문들이 청년들의 어려운 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단어라면서 무분별하게 '헬조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다. 청년들의 어려운 현실을 묘사하고 늘상 '헬조센'이라는 자조를 하면서 기사의 대부분을 끝맺는다. 


좋은 신문이라면 세태를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청년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해당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상수이다. 적어도 기획기사라면 무분별한 단어 사용은 더욱 제한돼야 한다.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매체는 사회적 책임에서 완벽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너무도 공고해 권력의 이동이 도무지 아래로 흐르지 않는 한국의 상황에 과연 매체가 결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마치 모든 것이 잘못 끼워진 단추마냥 '헬조센', '망한민국' 같은 말을 아무런 성찰도 없이 반복해서 사용한다. 어딘지 무책임하지 않나? 더는 신문에서 '헬조센'이라는 말을 보고 싶지 않다. 


이는 많은 경우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그저 어려운 청년 세태를 자신의 글감으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016.02.13)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조선일보식 위로라면 헬조선은 한겨레식 위로. 근데 위로라는 게 개인의 마음에 조금의 안도를 준다는 것 이외에 어떤 대안도 없는 건 맞다. 그래서 꾸준히 어떤 언론에서든 헬조선 담론을 전면 배치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했는데 그런 건 없고 정치권이나 언론이나 재미난 담론 하나 나온다 싶으면 무조건 자기 입맛에 맞게 소진될 때까지 써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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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뉴스타파나 시사인의 국정원 기획 한겨레21의 세월호 연속 보도 같은 건 좋은 기사를 찾아 읽고자 노력하는 나에게도 벅차다. 물론 아카이빙은 필요하다. 하지만 읽는 것이 힘든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피키캐스트나 위키트리가 페이스북 상에서 상당한 인기를 끄는 이유도 다른 뉴스에 비해 쉽고 가볍기 때문일 것이다. 일정 비율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누가 무거운 칼럼을, 세부적으로 샅샅이 파헤친 기사를 읽을까. 


과연 복잡하면서도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정보를 전달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효율적으로 또는 제대로 전달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나는 그 지점이 회의적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위키트리나 피키캐스트는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어쨌든 그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것들이 다른 언론사가 올리는 것들에 비해 몇 배는 쉽게 노출되니 말이다. (그들이 구성한 정보 중에서도 연합뉴스 등을 통해 바로 가져오는 정치경제 관련 기사는 잘 읽히지 않고 '좋아요'도 얼마 눌리지 않는다) 물론 쉽게 쉽게 읽고 정리할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은 선동의 영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콘텐츠의 양과 질은 압도적으로 늘어나고 높아졌는데 왜 점차 정보의 간극이 커져가는 것처럼 보일까. 


2. 늘 궁금한 것은 과연 신문이나 정물화가 어떤 가치가 있어서 살아남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은 없고 푸세식 화장실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못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다. 괜히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지하철에는 어느덧 무가지를 읽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탁소 주인 아저씨는 10년 전처럼 아파트를 돌며 세탁물을 받고 야쿠르트 아줌마는 잠시 카트를 세워두고 동네 마실나온 할머니들과 요구르트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3. 잘 모르겠다. 헬조센이 무슨 '담론'씩이나 되나. 그냥 기존에 하던 욕지거리가 적당한 말을 찾은 것 뿐이지. 웃고 킬킬거리는 것일 뿐이지. '이 나라는 망했어', '빨리 외국으로 나가자', '미래가 없어'는 말을 헬조센 안에 응축시킨 것 뿐이다. 거기에 뭔가 대단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나오기는 어렵다. 높은 확률로 단어가 인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 경우엔 그저 동어반복이다. 


301. 젊은 세대가 앞으로 나아갈 희망이 없어서 절망한다는 말을 들었다. 웃기는 소리다. 다른 세대와 같다. 젊은 세대도 생존을 걱정한다. 조금씩 나아진다는 희망 같은 건 버린지 꽤 오래다.


302. 위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기 때문에 이어지는 세대가 자동적으로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수명이 계속 늘어나고 아래 세대가 계속 없어지는 지금 시점에서 이는 결국 자본 간의 경쟁일 뿐이지 누가 죽어 없어진다고 갖지 못했던 누군가가 뭔갈 자동적으로 더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오히려 부의 되물림으로 인해 더 편중된 빈부격차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지금 20대는 현행 출산율로 이전 세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는 착취할 아래 세대도 없기 때문에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뭔가 착취해야 결국 상대적으로 위로 올라서는 것이 아닐까. 


303. 그럼에도 나는 기성세대가 나름대로 노력했고 그들의 방법이 최선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다. 그들은 나름의 삶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304. '헬조센' 같은 분노하는 수사만으로 이성적인 해결책을 도출해내지 못한다는 말도 사실 허구다. 많은 경우 해결책은 이미 나와있다. 다만 이는 헬조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사실 분노와 이성적 성찰 사이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 분노를 하면서도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지점이 있다. 그리고 아닌 지점이 있다고 본다. 


305. 수사로서의 가능성에서 '헬조센'은 나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많은 지점에서 애국심이 동원되는 나라이다. 일례로 얼마전에 만들어진 프로그램 '나는 대한민국'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방적으로 선전되는 수사에 대응할 수사 역시 간결해야 한다. 물론 정확한 비판은 언제나 필요하다. 헬조센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할 수 있겠으나 수사로서의 가능성에 헬조센은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있고 그것까지 부정할 수 없다. 아니면 전체 문제의식을 포괄하면서 해결방안까지 도출할 수 있는 섹시한 수사를 한 번 이끌어내보시든지. 


306. 차라리 헬조센 담론을 비판하고 싶으면 마치 마스터키라도 되는 양 심심찮게 헬조센을 신문지면에 들여오는 식자들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엄밀히 비판해야 할 의무가 있고 헬조센을 담론의 영역 안에 끌어들인 것도 그들이기 때문이다. 애먼 사용자들을 비판할 문제는 아니다. 


4. 다이버시티 대담 중에서 발취했다. '어떻게 보면 노동기사가 가장 쉬울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집회 현장 가서 그 사람들 이야기, 그러니까 부당 해고 당했다는 억울한 이야기 들어주고 기사를 쓰는 건 어떻게 보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 행동이에요. 그리고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아요. 그런 기사는 기업에서도 아파하지 않거든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니까. (중략) 그런 걸 넘어서야 해요.'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걸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 읽은 기분이었다. 나는 모 매체가 이런 '쉬운' 기사를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 쉬운 기사라는 말이 아니라) 근데 그마저도 기사 속에 화려한 미사여구가 많아 도무지 노동자들이 쉽게 읽을 수도 없는 그런 기사를 쓴다. 그리고 그 기사를 소비하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노동자가 아닌) 관계자들이다. 


솔직히 말해볼까. 이런 기사는 어느 누구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다. 대체로 저런 기사를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문체에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문체를 정립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기자들인데 그건 적어도 기사의 목적은 될 수 없다. 그건 소설가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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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게 왔을 적에 너는 향기로웠다. 나는 너를 포르투갈의 어느 작은 소도시 고성에서 처음 보았다. 딱 차분하니 알맞은 향기가 좋아 그리고 고성에서의 기억을 남기고자 너를 애써 데려왔다.


처음에는 너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가벼운 철제 상자에 든 너는 존재만으로도 내뿜는 향만으로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너는 내게 이미 지나온 고성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 다시 너를 본다. 너는 어느새 다 갈라져 이전만큼의 향을 내뿜지도 못한다. 갈라진 틈으로 검은 골짜기가 보인다. 나는 가만히 들여다본다. 언제였나. 누군가 부주의하게 뜯어낸 너를 나는 물에 담뿍 묻혔다. 너를 문질렀다. 너는 거품을 내주었다. 나는 네가 하얗고 동그랗던 날을 기억한다. 너는 이제는 그만 검은 틈새를 드리운다. 


네가 더는 없게 되면 나는 너의 검은 틈을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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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나는 '학생들이 데모 때마다 삼성은 매판 자본이라고 하는데 군의 소견은?'이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학생들의 주장이 옳다고 대답했다. 당시의 내 견해였다."라고 (제일모직 66년 당시 삼성 면접 시험 문제)


그 도둑놈들은 빵을 만드는데 증기를 이용하고 있어. 그건 악마의 발명품이야. 나는 북서풍과 북풍을 이용해. 이 바람들은 하느님의 숨결이란 말이야. (중략) 우리는 말들에게 이끌려 론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배들처럼 우리 동네의 지방법원처럼. 옛날에 남자들이 입던 꽃을 수놓은 긴 꼬리가 달린 코트처럼. 풍차 방앗간도 과거의 물건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네.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


완벽한 온도 완벽한 습도 완벽한 청결상태 완벽한 서비스 완벽하게 대접받는다는 느낌. 호텔을 계속 찾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완벽의 느낌이 좋아서 아닐까. 돈을 주고 완벽을 산다니 그거야말로 자본주의의 축복이 아닌가. (플라자호텔) 


헤밍웨이처럼 "쓰는 것은 마치 영원과 마주하는 것과 같다 라는 식의 비장한 각오는 아니더라도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바로 앞이 칠흑 같은 어둠이더라도 멈추지 말고 어쨌든 써야 한다는 것 그렇게 억지로라도 쓰다보면 언젠가는 저 멀리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리라. (손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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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론이 디지털화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이는 뉴욕타임즈나 가디언이 잘 보여준다. 단순히 페이스북 유입량이 많고 카드뉴스 좀 잘 만든다고 해서 디지털화 됐다고 판단할 수 없다. 그건 섣부른 판단이다. 분명한 것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기존 보수 언론의 기득권이 점차 깨져가고 있다는 사실이고, 여기서 헤게모니를 누가 잡을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언론으로서는 그야말로 예측 불허의 시대인 것이다.


어떤 직관적인 디자인이나 특정한 센스가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디지털화는 그리 만만하고 간단한 문제라고 볼 수 없다. SBS가 판을 깔아준 스브스뉴스는 그 콘텐츠를 활용하는 측면, 아이디어에서 훌륭하지만 일단 직접 취재한 콘텐츠가 아니고 SBS라는 울타리가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 이는 또한 대체로 저널리즘 훈련을 받지 않은 대학생 인턴들에 의해 제작된다. 스브스뉴스의 예를 많이 드는데, 이것이 한국 언론의 디지털화의 대표주자라면 그 방향은 심히 우울할 것이다. 이는 그저 기본 콘텐츠를 가공하고 변형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요자 입장에서는 즐길 만한 콘텐츠라고 볼 수 있겠으나 스브스뉴스가 어떤 특정 가치를 새롭게 창출해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스브스뉴스 자체의 성취에 대해서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스브스뉴스는 기본적으로 반권위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가 지금보다 더 친절하고 덜 권위주의적이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스브스뉴스는 좋은 플렛폼이다. (7월 3일) 


2. 본디 절박함은 한 사람을 기괴하게 만든다. 오죽하면 '시험에 든다'는 말이 있을까. 오로지 환경 외에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7월 2일) 


3. 구로공단 반세기 특별전 가리봉오거리. 서울역사박물관. 거의 완벽했던 전시였다. 집에 누워서 네이버지도로 가리봉동을 한 번 쓸어본다. '내가 기사를 쓴다면 너와는 달리 내가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나이기 때문일 거야.' 네이버지도로 본 가리봉동에는 더는 구로공단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가게만 가득하다. 


70년대 여공들을 삶을 찾아야 할 일이 있었다. 당시 뉴스를 모두 뒤졌다. 70년대 신문 속에 그들은 자주 등장하지는 않았다. 등장한다고 해도 주로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수출역군 혹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여공의 질식사. 


4. 사실 데이트폭력이라는 건 대개 연애상태가 끝난 뒤에 더 명확히 인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들의 폭로가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질문에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것에 시일이 정해져있다는 것도 착각이겠거니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제대로 응시하고 이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시일이 정해져 있지 않다. (6월 16일) 


5.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이번 퀴어문화축제를 계기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돌 것으로 보인다. 우선 퀴어퍼레이드가 올해 처음으로 열리지 못할 뻔했다는 사실. 이는 그제서야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이 '무엇'을 뒤흔들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에서 파생된 행동이므로 긍정적이다. 비로소 성소수자는 '그들'의 인지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둘째로 많은 외국 대사들이 퀴어문화축제 개막식에 참석해 지지 응원을 보냈다는 점 또한 이것이 향후 몇 년 안에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로 부상할 것임을 시사한다. 개막식에 왔던 외국 대사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는데 가장 먼저 이들이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함께 갈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엿보았고 그 다음으로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그저 하나의 문화사대주의처럼 번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다시 그런 식으로 '빚을 질 수는' 없다. 


또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그저 성소수자에서 그치지 않고 노동이나 장애 혹은 여성과 같은 다른 인권 운동으로 번지려면 'LET THEM DO'가 아니라 'WE HAVE TO DO'가 돼야 하는데 사실 이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다. 성소수자가 자신과는 관계 없고, 흔히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지지한다면 당장 돌아오는 비아냥 '너희 아들 딸이 성소수자여도 괜찮나' 혹은 '뭘 하든 상관 없는데 내 눈에 안 보이게만 해라'는 조롱은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LET THEM DO'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 이런 발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LET THEM DO'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혐오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본다)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 가 아니라 이것이 당장 내 문제가 돼도 괜찮다, 나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더라도 보편 인권 안에서 보장돼야 한다, 는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어떤 인권 운동도 요원할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극단적인 갈등이 공감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이것이 언젠가 내 문제가 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인식 운동으로의 전환을 이뤄야 할 것이다. 예컨대 대학 청소노동자 문제를 든다면, 나는 많은 수의 대학생들은 '자신이 '감히' 청소노동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그 문제가 무관심·무인지의 영역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이것을 깨트리는 건, 언젠가 나도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그리고 블루칼라든 화이트칼라든 모든 노동은 평등하다는 자각뿐이다. 물론 임금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절망적으로 요원해보인다.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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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생각을 하게 된다. 다소 즉물적인 '언제쯤 내 손으로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을까', '돈 벌어서 집 사고 싶다(내 힘으로 월세 내고 싶다)/효도하고 싶다'와 같은 말초신경에 기대는 생각부터 두려움과 자책까지 하루종일 넘나든다. '그냥 세 끼 밥만 먹고 살겠다는데 그게 왜 이렇게 힘드니'. 요즘 나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내 생존으로 치환시킨다.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도 강렬해 다른 생각을 죽인다.   


이 길을 결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렇기에 다시는 고민하지 말자고 여기면서 들어왔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 앞에 서면 불쑥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딱히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건 그 다음 생각이다. 도망칠 곳이 없어 남았다. 남겠다고 선택한 것도 배수진을 친 것도 나였다.  


'너 말고 다 그래'라는 생각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말이 고통을 경감시켜주기는 커녕 수상한 의문만 남게 한다. '왜 다들 그래야 하는데?' 신문에서는 명문대생도 힘든 사회라고 한다. 비명문대생이 힘들다는 건 이미 상수에 불과하다. 그건 고려할 가치도 되지 않는다. 어딘가에서는 학생들이 다니던 학과가 없어진다는데 마치 풍문처럼. 여러 비극들이 인터넷을 떠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같은 말도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건 그렇게 됐'으므로. 당위적인 차원의 '어떻게!'라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지지보다는 조롱을 보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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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이 다가온다. 알 수 없다. 이것이 이렇게도 불안한 것이었나. 


속에서부터 불안이 치밀어오른다. 하루 종일 매스껍다. 매일 전운의 기분을 느끼며 깨어나고 잠든다.


"어딘가 다른 행선지가 필요해"


어제는 그 행선지로 가는 시험을 치렀다. 다들 나처럼 행선지가 필요한 사람들 뿐이었다.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행선지로 가고 싶은 사람은 여기 이렇게 차고 넘치는데 행선지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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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ytimes.com/2015/05/10/nyregion/at-nail-salons-in-nyc-manicurists-are-underpaid-and-unprotected.html


(내일이 발표인데 이런 잡글이나 쓰고 있는 내 자신을 믿을수가 없어 정말) 


얼마전 전세계 언론인을 다시 한 번 충격에 빠트린 뉴욕타임즈의 기사 The Price of Nice Nails(반짝이는 매니큐어 속에 숨겨진 네일 미용사들의 어두운 삶)은 무려 14개월 간의 취재 끝에 탄생했다. 14개월은 1년이 넘는 기간이다.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언론계에 관심이 있거나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1시간이면 이미 늦는 'SNS시대'에 뉴욕타임즈가 쓰는 시간은 어쩐지 턱없이 길어 보인다. (그리고 이는 결국 비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과연 14개월동안 성과가 나오지 않는 기자를 (여기서의 성과는 기사를 뜻한다) 얼마나 믿고 지원해줄 수 있을지는 결국 자본이 결정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언론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진정으로 이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그 바람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깨닫게 되었다.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엄정한 선언처럼 느껴졌다. 명제는 너무도 확고해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이번 뉴욕타임즈 기사는 그것이 단지 착각에 불과할 뿐이고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애쓰면 조금씩 바뀐다는 것을 마치 한 편의 우화처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느냐고. 뉴욕타임즈는 2015년 5월 7일에 냈던 네일숍 기사로부터 4일 지난 지난 11일 짤막한 기사를 하나 냈다.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네일숍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조치를 지시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러니까 어떤 기사는 세상을 바꾼다.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지만 쉽게 쓰이지 않은 기사로 세상은 변할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성인이 된 직후에 주문처럼 깨달았던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은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분명하게도 '어떤' 글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뉴욕타임즈는 보여주고 있다. 


물론 뉴욕타임즈까지 멀리갈 것도 없다. 한국 언론 역시 제각기 나름의 현장에서 훌륭한 보도를 선보이고 있다. 이들로 인해 이들의 집요함으로 인해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것이 너무 작은 걸음이라 쉬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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